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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리 엄마 맞나?

📖 본문: 시편 23:4🏷 분류: 예화📅 부활절
[일요 편지 3645] 2026년 5월 11일 일요일 진짜 우리 엄마 맞나? 할렐루야! 2026년 부활절 후 네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5월 11일 오늘 남은 시간도 즐겁고 기쁜 시간이 내내 계속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이곳 김포는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교차가 심합니다. 아침저녁에는 아직 춘래불사춘입니다. 오늘 남은 시간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배우 전원주가 치매 초기 진단 사실을 고백해서 안타까움을 안겼습니다. 29일 방송된 어느 방송에 전원주가 출연해 자신의 근황과 솔직한 심경을 전했습니다. 이날 전원주는 30년 전 이사했던 동네를 다시 찾으며 긴 연기 인생을 돌아봤습니다. 그는 “64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얼굴이 이래서 식모 역할만 했다”고 웃으며 “그래도 광고를 찍으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다가 시끄럽게 웃으면 그때 알아본다”고 덧붙였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 어느 날 아침, 엄마는 새빨간 비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 우산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기이한 모습 앞에 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 잔인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마귀할멈’…순간적으로 치민 혐오와 공포 뒤로,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왔습니다. 저 붉은 비옷은 어쩌면 이 비정한 세상을 떠나 당신만의 본향으로 돌아가려는 영혼이 차려입은, 가장 화려한 외출복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손으로 그 붉은 소매를 가만히 붙잡았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평온하게 보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약과 주사는 엄마를 낫게 하기 위한 처방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엄마를 더 평온하게 멀어지게 하기 위한 이별의 준비였음을, 나는 그 빨간 비옷 앞에서 겨우 이해했습니다. 엄마는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고, 저는 그 거대한 퇴장을 뒤따라갈 힘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알던 엄마였나’하는 생각이 스칠 때마다 마음은 더 어지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기이한 행동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한 사람의 눈물겨운 몸짓이었습니다. 엄마는 저를 떠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시간과,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저토록 애타게 감천 외가로 가려는 마음은 무엇일까? 돌아가신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형제들이 북적이던 그곳을 찾는 마음은 결코 단순한 망상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왔던 무거운 책임감의 흔적일지로 모릅니다. 사람은 삶이 고달프거나 현재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자신이 가장 온전하게 사랑받고 보호받았던 시절로 돌아가려 합니다. 엄마에게 그곳은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하던 공간이자, 풍파에 깎이기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엄마의 시계는 이제 제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그 길 위에서 엄마가 부디 아픈 기억은 흘려보내고, 오직 사랑받았던 기억들만 차곡차곡 챙겨 가길 빌어봅니다. 엄마가 그토록 향하고자 했던 곳은 과거라는 시간이 아니라, 누구의 엄마도 아닌 오직 ‘나’로 온전해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출처; 혜화동 한에서 치매 엄마랑 살아요, 김영연 작가) ●아이들도 '엄마 최고' 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남편도 아내를 아낌없이 칭찬하지.[잠31:28]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의 상태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쉽게 빚을 수 없는 예술 작품이다.(루스벨트) ●●아랫부분은 원치 않으시면 읽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에서 '눈치'는 미덕인가, 비밀경찰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은 중동 사태 때문에 너무 바쁩니다. 최근엔 휴전 과정이 시작되면서 심리적 여유조차 없어졌습니다. 나는 전쟁 초기부터 다수의 예상과 달리 이것이 오래갈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그때는 엄청 신경이 쓰였습니다. 취재한 내용을 비관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눈치껏 낙관적으로 전해야 하나? 당시 이 눈치라는 것이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눈치에 대해 좀 더 파헤쳐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눈치’를 처음 알게 된 건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KTX를 타고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시절이라 객차에서 좀 큰 소리로 신나게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카이스트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튀르키예 선배가 제지했습니다. “야, 너 눈치도 없어? 기차 좀 봐봐. 다들 조용하잖아. 너만 소리가 커!” 당시 처음 접한 ‘눈치’는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일종의 배려 제도로 받아들였습니다. 들어가 있는 환경을 잘 살펴보고, 그곳의 기본값을 파악해 본인의 자세도 그렇게 맞추는 일이 결국 사회를 배려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눈치 있게 움직이면 사회적 갈등도 없어질 거라고 믿었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만 있는 이 눈치 문화를 국제적으로 아주 열렬하게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것의 어두운 면도 깨달았습니다. 최근에는 ‘눈치’가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이른바 혁명이 터지고 난 뒤에 도덕성을 감시하는 비밀경찰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나라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대화하다가 예민한 주제가 나오면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현장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한국은 그런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와 자유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그 고급스러운 도덕관과 선의가 때로는 억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혹은 사회를 지나치게 배려하려고 하다가 자유로운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눈치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눈치를 어느 정도 보면서 살아야 할까요? 눈치 안 보고 살면 무례한 사람이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고, 지나치게 눈치 보고 살면 사회 분위기가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감시 사회가 되고…. 어설프지만 내가 세운 기준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인 것은 눈치 때문에 희생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기차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저만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눈치 때문에 사회적 이득이나 타인의 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기자로서 사회적 이익을 위한 중요 정보는 눈치 보지 말고 공유하는 것이 맞습니다. 눈치 보면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한 기준이 뭔지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독자들에게 조언하자면, 상황을 눈치껏 구분해서 눈치를 좀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원고를 거의 마감 직전에 전달했기에 이번에는 눈치가 많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일찍 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출처 ; [알파고의 지식램프]에서, 알파고 시나씨 프리랜서 기자) 이 게시물을
설교 포인트

치매로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과 인내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을 찾아가야 합니다.

적용

가족 중 아픈 이들을 향한 마음의 상처와 혼란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으로 섬기며 평안을 구합시다. 또한 기억이 희미해져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치매가족엄마기억사랑이별책임감본향영혼의 안식처슬픔회복회상평온이해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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