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면 보인다 낮은 곳에서 안 보이던 것이 높은 곳에서는 보이고, 이쪽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저쪽에서는 보이는 것처럼 새사람이 되면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육체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다. 체력으로 곰을 당할 수 없고, 키로 기린을 따라갈 수 없으며, 힘으로 고릴라를 이길 수 없고, 날기로 독수리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인 것으로 매겨지는 존재가 아니라 지, 정, 의, 즉 인격으로 평가되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잘못을 깨달으면 돌이킬 줄 안다. 인간의 위대함은 바꾸어진 인격과 변화된 삶에 있다. 러셀은 그의 작품 ‘자유의 길’에서 말한다. 아무리 사회가 진보되고 개혁되어도 그 사회에 대해 반역하는 인간은 역시 생길 것이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인류사회에 남는 최후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제는 평균분배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다. 제도나 주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이 달라져야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대했다. 허나 번번이 실망이다. 군사혁명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정권만 바뀌었을 뿐 우리 사회는 달라진 것이 없다. “먼저 사람을 만들라. 그리하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드의 말이다. 자기 죄를 보고, 말할 수 있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 까닭은 나를 죄에서 떠나게 하고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수치는 죄를 짓고,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어야 한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케노풀이란 청년이 어떤 물건을 사들고 오는 것을 보고 “어디서 샀느냐? 그 물건을 만드는 공장은 어디냐?”고 물었다. 케노풀은 “○○에서 샀고, 만드는 공장은 ○○다”고 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착하고 덕스러운 인간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고 물었고, 질문을 받은 케노풀은 몹시 당황하며 “모른다”고 했다.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8). 이 시대는 새 사람을 요구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게 하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김우영 목사 이 게시물을